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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사진

 

타르코프스키와의 첫 만남

   이 글을 쓰며 처음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봤을 때를 떠올려 본다. 아마 *"스토커"*였을 것이다. 그날은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평소처럼 영화를 틀었는데, 이건 뭔가 달랐다. 영화 초반 10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우들은 천천히 움직였고, 대사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침묵. 뭔가 많이 이상했지만 영화가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루하게 느꼈을 법한 장면들인데 그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의 눈길을 끌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은 채 화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영화가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기다려 봐. 급할 것 없어."

   그렇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내 안에 스며들었다.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머물렀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의 의미 –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는 것’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짧은 컷과 빠른 편집으로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정반대다. 그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려서 관객이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 롱테이크 –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담다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컷 편집도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우리는(관객은) 화면 속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  "스토커"(1979) – ‘존(ZONE)’으로 향하는 인물들. 몇 초 만에 지나갈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그는 몇 분에 걸쳐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과(배우들) 함께 걷고, 기다리고, 숨을 죽인다. 그 긴 정적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  "거울"(1975) – 한 여성이 창문을 바라보는 장면. 아무런 대사도, 큰 사건도 없지만,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마치 우리의 기억 속 어떤 한 장면처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시간은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면서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것이 된다.


자연과 인간 – 타르코프스키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인물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가지며, 마치 인간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물, 불, 바람 –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의 영화에서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이 ‘물’과 ‘불’이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다.

  •  "노스탤지아"(1983) – 빗속에서 촛불을 들고 걷는 남자의 모습. 그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버티는 그 장면은, 단순한 ‘미션’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은유처럼 다가온다.
  •  "희생"(1986) – 집이 불타는 마지막 장면. 불길이 타오르는 동안, 화면은 천천히, 너무도 천천히 그 장면을 응시한다. 그 불길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인간의 희생과 속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바람은 마치 ‘징조’처럼 등장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언가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의 영화에서 자연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다.


침묵–명상과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철학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긴 명상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침묵과 사운드 – 소리가 없는 순간이 더 강렬하다

우리는 보통 영화에서 음악이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오히려 소리가 없는 순간이 더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자도 전자의 의견이였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 이후 후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게 되었다.

  •  "스토커"(1979) – ‘존’에서 들리는 희미한 물소리, 바람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치 존재 자체를 상기시키는 듯하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 종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 그동안의 침묵이 깨지면서, 우리는 마치 온몸으로 그 울림을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우리가(관객이) ‘듣도록’ 만든다. 신기한 것이 음악이 없는 순간, 우리는 더 집중하고,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가 남긴 것

그는 54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영화들은 나를  포함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이반의 어린 시절 (1962) – 전쟁 속에서 성장한 소년의 이야기.
✔️ 안드레이 루블료프 (1966) – 예술가의 고뇌와 시대적 갈등.
✔️ 거울 (1975) – 자전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서사.
✔️ 스토커 (1979) –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
✔️ 노스탤지아 (1983) – 고향과 실존적 고민을 다룬 작품.
✔️ 희생 (1986) – 인간의 희생과 믿음에 대한 마지막 질문.


결론 –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다가온다. 마치 우리의 기억처럼, 우리의 꿈처럼.

그는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의 영화를 통해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기억을 떠올릴까?
시간은 정말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일까?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그의 영화는 단순한 ‘관람’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여운을 남기는 하나의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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